한국 펜테코스트(PENTECOST)의 전래(傳來)는 1928년 봄, 미스 럼시(Miss Mary C. Rumsey)가 서울에 도착함과 동시에 시작된다. 럼시 선교사는 원래 뉴욕시 근교에 있는 감리교회 성가대원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목수(木手)요,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났던 관계로 그녀는 외할머니 슬하에서 자라나 성장해서 간호원으로 일했고 1906년부터 1907년까지의 로스엔젤레스 대부흥때 은혜를 받아 감리교계통 신학을 공부했다. 1906년 4월 로스엔젤레스 한 다락방에서 성령세례를 받은 그는 "한국으로 가라!"는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당시 로스엔젤레스 부흥은 '늦은 비' 성령 역사의 지속이었다. ▶럼시 선교사
예수께서 부활승천 하신 후 마가의 다락방에 떨어졌던 성령의 불길은 중세 암흑지대를 거치는 동안 사그라져 깜빡이는 등불처럼 그 명맥만 유지해 오다가 루터의 종교개혁에 의하여 잃었던 복음주의 신앙을 돠찾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늦은 비 성령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엘리야시대에 3년 6개월간 기근(饑饉)이 있었던 것같이 마가의 다락방에 쏟아졌던 이른 비성령의 역사가 근 1900년간 지우현상(遲雨現狀)이 보였으나 1901년 1월 1일, 20세기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 미국 켄사스주 토페카시에 있는 벧엘성서신학교 (Bethel Bible Collge) 늦은 비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성령의 세례는 요원의 불길처럼 미국 전역을 휩쓸었고 로스엔젤레스 대부흥때, 럼시는 그 자리에 있었으며 성령체험을 하고 사명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가난했기 때문에 도저히 선교비를 마련할 길이 없어 근심하며 기도하던 중에 성령께서 같은 교회의 덴버드라는 사람을 감동시켜서 선교비를 지원해주도록 하셨다. 덴버드라는 사람은 감리교인이었으나 어려서부터 뜨거운 신앙의 소유자였고 명절 때 선물받은 물건까지 팔아서 헌금하던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덴버드의 후원으로 한국 땅에 도착한 럼시 선교사는 하디(R. A. Hardie)목사가 기거하던 감리교의 최초병원 시병원(施病院)에 여장을 풀었다 이 시병원은 의료선교사 스크랜튼(William B .Scranton)과 헤론(John F. Heron)이 세웠는데 이 시병원은 감리교가 세운 최초의 병원이라는데 큰 의의가 있다.
이즈음 감리교 선교사들이 거의 다 이 시병원 건물에 주재했는데 그 중에는 이 땅에 한국선교의 꽃을 피워냈던 감리교 선교사 아펜셀라 (H.D. Appenzeller) 부부와 원산 부흥운동을 주도한 하디 목사가 있었다. 한편 한국정세는 이미 일본이 음모와 무력과 잔인한 수법으로 한국을 합병했으며, 1919년 3·1운동을 치루고 난 뒤, 민족적 차원에서 볼 때 독립운동의 여명기요. 교회적으로는 크나큰 수난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럼시 선교사는 정동 시병원숙소에서 꿇어 엎디어 "하나님이시어! 당신의 명령에 따라 무조건 코리아에 왔습니다. 저로 하여금 이 땅에서 이루시고자 하는 당신의 뜻을 부족함 없이 이루게 하소서" 하고 간절히 기도드린 후 발길이 닿는대로 걸어서 구세군 조선본영 사무실로 갔다. 여기에서 럼시 선교사는 사무원으로 일하고 있던 청년 허홍(許弘)을 만나 "조선에 오순절신앙을 전교(傳敎)하러 왔는데 전혀 생소한 곳이어서 구체적인 방안이 서질 않으니 허선생께서 좀 도와주시오"라고 간청했다.
1928년, 미스 럼시(Miss Rumsey)의 내한(來韓)
한국 펜테코스트(PENTECOST)의 전래(傳來)는 1928년 봄, 미스 럼시(Miss Mary C. Rumsey)가 서울에 도착함과 동시에 시작된다.
럼시 선교사는 원래 뉴욕시 근교에 있는 감리교회 성가대원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목수(木手)요,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났던 관계로 그녀는 외할머니 슬하에서 자라나 성장해서 간호원으로 일했고 1906년부터 1907년까지의 로스엔젤레스 대부흥때 은혜를 받아 감리교계통 신학을 공부했다. 1906년 4월 로스엔젤레스 한 다락방에서 성령세례를 받은 그는 "한국으로 가라!"는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당시 로스엔젤레스 부흥은 '늦은 비' 성령 역사의 지속이었다.
▶럼시 선교사
예수께서 부활승천 하신 후 마가의 다락방에 떨어졌던 성령의 불길은 중세 암흑지대를 거치는 동안 사그라져 깜빡이는 등불처럼 그 명맥만 유지해 오다가 루터의 종교개혁에 의하여 잃었던 복음주의 신앙을 돠찾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늦은 비 성령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엘리야시대에 3년 6개월간 기근(饑饉)이 있었던 것같이 마가의 다락방에 쏟아졌던 이른 비성령의 역사가 근 1900년간 지우현상(遲雨現狀)이 보였으나 1901년 1월 1일, 20세기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 미국 켄사스주 토페카시에 있는 벧엘성서신학교 (Bethel Bible Collge) 늦은 비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성령의 세례는 요원의 불길처럼 미국 전역을 휩쓸었고 로스엔젤레스 대부흥때, 럼시는 그 자리에 있었으며 성령체험을 하고 사명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가난했기 때문에 도저히 선교비를 마련할 길이 없어 근심하며 기도하던 중에 성령께서 같은 교회의 덴버드라는 사람을 감동시켜서 선교비를 지원해주도록 하셨다. 덴버드라는 사람은 감리교인이었으나 어려서부터 뜨거운 신앙의 소유자였고 명절 때 선물받은 물건까지 팔아서 헌금하던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덴버드의 후원으로 한국 땅에 도착한 럼시 선교사는 하디(R. A. Hardie)목사가 기거하던 감리교의 최초병원 시병원(施病院)에 여장을 풀었다 이 시병원은 의료선교사 스크랜튼(William B .Scranton)과 헤론(John F. Heron)이 세웠는데 이 시병원은 감리교가 세운 최초의 병원이라는데 큰 의의가 있다.
이즈음 감리교 선교사들이 거의 다 이 시병원 건물에 주재했는데 그 중에는 이 땅에 한국선교의 꽃을 피워냈던 감리교 선교사 아펜셀라 (H.D. Appenzeller) 부부와 원산 부흥운동을 주도한 하디 목사가 있었다.
한편 한국정세는 이미 일본이 음모와 무력과 잔인한 수법으로 한국을 합병했으며, 1919년 3·1운동을 치루고 난 뒤, 민족적 차원에서 볼 때 독립운동의 여명기요. 교회적으로는 크나큰 수난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럼시 선교사는 정동 시병원숙소에서 꿇어 엎디어 "하나님이시어! 당신의 명령에 따라 무조건 코리아에 왔습니다. 저로 하여금 이 땅에서 이루시고자 하는 당신의 뜻을 부족함 없이 이루게 하소서" 하고 간절히 기도드린 후 발길이 닿는대로 걸어서 구세군 조선본영 사무실로 갔다.
여기에서 럼시 선교사는 사무원으로 일하고 있던 청년 허홍(許弘)을 만나 "조선에 오순절신앙을 전교(傳敎)하러 왔는데 전혀 생소한 곳이어서 구체적인 방안이 서질 않으니 허선생께서 좀 도와주시오"라고 간청했다.